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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바쵸프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전차에 대해서, 빵가게에 대해서, 넵스키 대로에 내리는 소나기에 대해서, 여자들의 구두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무엇이든지, 정말로 뭐든지 다 이야기로 만들 수 있었어요.” 아무리 소소한 소재라도 이바쵸프의 입을 거치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재미있고 매혹적인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전차에 무임승차하려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빵 속에서 발견된 외화 때문에 체포됐지만 같은 빵 속에서 발견한 다이아몬드를 뇌물로 주고 풀려난 사람의 이야기, 넵스키 대로에 소나기가 내릴 때 갑자기 비를 맞고 홀딱 젖은 채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새로 구두를 사서 뽐내며 신고 다니다가 전차 안에서 건설 노동자의 흙투성이 발에 밟혀 울상이 된 멋쟁이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     정보라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의 초기 단편 모음집이다. 인용문은 러시아 배경의 ‘Nessun sapra(네순 사프라)’. 종전 후 숙청당해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전설적 소설가 이바쵸프와 그가 죽자 시체를 잘라 먹으며 사랑을 지켰다는 간호사 류보프의 얘기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상적인 생활, 내 어린 날의 생활이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이바쵸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류보프의 회고인데, 한편으론 왜 사람들이 이야기의 마법을 필요로 하는지도 말해 준다.   나무가 돼버린 친구를 위해 복수하는 ‘나무’ 등 기이하고 비현실적 세계에 냉엄한 현실과 잔혹한 복수를 뒤섞는 정보라 환상문학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전설적 소설가 멋쟁이 아가씨 비현실적 세계

2024-04-24

[문장으로 읽는 책] 아르헤리치의 말

모든 것이 내가 피아노를 못 칠 거라 도발했던 어린이집 남자아이에게서 시작됐다. 사람은 도전에 몸을 던지면서까지 세상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그런 게 재능이다. 어릴 때는 몰랐다. 나중에 책 『영재의 비극:진정한 자기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사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하고 싶어 한다. 바흐가 신의 마음에 들고자 했던 것도 결국 다르지 않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헤리치의 말』   “우리는 재능이 과연 무엇인지 썩 잘 알지 못해요. 재능이 신의 산물인지 노력의 결과인 것인지, 그 둘 다인지 그것조차 확실히 모르죠. 나는 재능이란 노력이 따라줬을 때 원활하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80대에도 현역인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인터뷰와 단문 모음집이다. 윗 구절을 종합하면 ‘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하고 싶은 것에 노력을 다하는 것’이 재능이라는 게 천재 피아니스트의 말이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굴다를 인용하며 아르헤리치는 악기 안으로 깊게 들어가면 “반죽을 손으로 주물러가면서 놀 때처럼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악기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데, 그 컨디션도 연습에 달렸다. 피아니스트가 꾸는 악몽은 무대에 올라 들어본 적 없는 작품을 연주하는 꿈이고, 한때는 오케스트라의 여자 첼리스트들이 첼로를 허벅지 사이에 끼우지 않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연주했었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피아노 여제 천재 피아니스트 어린이집 남자아이

2024-04-17

[문장으로 읽는 책] 물속의 철학자들

“신은 보이지 않잖아요. 산소도 안 보여요. 그러니까 신은 산소 아닐까요.” 재미있는 의견이었다. 그 학생은 신이 만든 우주에 왜 산소가 없을까 의아한 모양이었다.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니, 신은 지구에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산소가 있다. 그러니까 신은 산소인 것이다. “그러면 신은 몸속에도 있는 거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 학생은 “하지만 토하면 나가버려요”라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나가이 레이 『물속의 철학자들』   학교·기업 등에서 ‘철학 대화’를 이끄는 저자의 책이다. “신은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한 여중생이 내놓은 답이다. 저자는 “어째서 엉뚱한 말은 미움을 받을까, 어째서 그런 건 철학이 아니라고 여겨질까”라고 묻는다.   “의외로 아이들은 엉뚱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모범답안, 부모에게서 이어받았을 법한 사상, 사회에 널리 퍼진 상식을 입에 담는다.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맞히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철학자들은 이상한 말, 꽤나 비상식적인 사고실험을 하는 존재다. 정답 아닌 자신만의 답을 찾는다.   우리 삶 속 철학의 쓰임새를 묻는 책이다.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다.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골머리를 앓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질문이. 언제까지 계속 일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요? 보통이란 뭔가요? 나는 태어나도 괜찮았던 걸까요? 질문 때문에 쓰러질 듯해도 질문과 함께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을 나는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철학자 물속 철학 대화 모범답안 부모 나가이 레이

2024-04-10

[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건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오래된 소설이 새롭게 또 나왔다. 전후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아이콘 다자이 오사무의 1947년작. 끔찍한 전쟁을 겪은 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고 능청을 떨며 허무와 불안을 달랜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인 주인공 남매는 하나는 자살하고, 하나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홀로 키우며 세상의 도덕률에 맞선다.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맛있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서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틀림없이 거짓말한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소설이다. 단, 당대로선 파격적 여성상이겠지만 지금 독자에겐 남성 작가의 한계도 느껴진다.문장으로 읽는 책 사양 다자이 오사무 아이콘 다자이 자제인 주인공

2024-04-03

[문장으로 읽는 책] 최재천의 공부

동물 세계에는 선생님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냥 거기 있고 아이들이 보고 배웁니다. 저는 우리가 약간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먼저 가르치려고 덤벼들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일종의 촉진자가 되어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최재천·안희경 『최재천의 공부』   “엄마 침팬지는 실패하는 새끼 옆에서 자기 열매만 깨 먹고 있습니다. 가끔은 새끼가 엄마 침팬지 걸 뺏어 먹어요. 뺏기면 할 수 없지만 ‘배고프지? 엄마가 까줄게’ 그러지는 않습니다. 새끼는 배고프니까 어떻게든 기술을 익혀서 먹으려고 엄마 침팬지를 더 세심하게 관찰하겠죠. 마침내 자기가 혼자서 탁! 깨 먹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자식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조급증이 결국 자식에게 독이 됐더란 얘기는 주변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생태학자인 최재천 이대 석좌교수가 대담 형식을 통해 ‘공부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교육 문제로 귀결된다는 결론. “사회의 고통은 과목별로 오지 않는데 아직도 교실에서는 20세기 방식으로 과목별로 가르친다”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도 인용한다. 20대 초반에 배운 것으로 평생 우려먹고 살 수 없는 평생교육 시대, ‘취미 독서’의 나이브함도 경고한다.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일’입니다. 빡세게 하는 겁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최재천 공부 최재천 이대 엄마 침팬지 취미 독서

2024-03-27

[문장으로 읽는 책] 아노말리

“선생님은 우리 모두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디 앨런이 한 말을 약간 비틀어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프로그래머들한테 그럴싸한 핑계라도 있길 바랍니다. 그들이 창조한 세상이 어쨌든 개판이니까요. 그렇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개판을 만든 장본인은 우리입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 『아노말리』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미스터리한 비행기 사고로 300여명의 승객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과학자·철학자·정치인·종교인 등이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일련의 과학자들은 ‘매트릭스’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그램이 거의 확실하다’라면서 말이다.    물론 명백한 답은 없다. 세상은 끝내 미스터리로 남고, 어느 게 원본인지 모르는 ‘나’와 ‘또 다른 나’는 제각각 살아간다. 서로를 통해 삶의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2020년 콩쿠르상 수상작품. 이상·변칙·모순이라는 뜻의 ‘아노말리’는 소설 속 소설이기도 한데, 소설 안에서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는 짜릿한 리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매력적인 사유실험” “자아와의 대면” “수준 높은 오락과 진지한 문학의 교집합”이라며 전 세계 매체들이 호평했다. 콩쿠르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기도 하다. 수학자·언어학 박사이기도 한 작가는 국제적 실험 문학 집단인 ‘울리포’ 회장직을 맡고 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콩쿠르상 수상작품 언어학 박사 우디 앨런

2024-03-20

[문장으로 읽는 책] 어금니 깨물기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 입으로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눈에 띄지 않은 어른들을 둘러보면, 거기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어딘가에서, 우리가 눈길을 자주 줄 리 없는 어떤 일을 평생을 바쳐- 바친다는 마음도 품지 않은 채로 그저 스스럼없이 묵묵하게- 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를- 누구를 안 보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고작 그 정도의 말일 뿐이다. 보는 태도 때문에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어리석다.     김소연 『어금니 깨물기』   결국은 태도가, 시선이 문제다.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이다. “치장 없는 시의 진가”를 보여주는 폴란드 시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에 대해서도 이렇게 쓴다. “태도와 시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 쉼보르스카가 시를 위해 우선 노력한 것은 이것들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무관심하게 지나친 것은 없는지, 놓친 것은 없는지.”  쉼보르스카를 읽으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을 다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인간됨을 회복하는 순간을 겪는다.” “시의 언어가 일상 언어와 따로 있다고…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시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람의 위대함을 완성해갔다.”   책 제목처럼 어금니 깨물고 버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던 시절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어금니 김소연 시인 폴란드 시인 태도 때문

2024-03-13

[문장으로 읽는 책] 충분하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으로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 『어금니 깨물기』에서 ‘비미(非美)의 미’의 시인으로 소개된 쉼보르스카를 꺼내 읽는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을 소재로 한 시 ‘베르메르’의 전문이다. 쉽고 짧고 명징하다. 우유를 따르는 일상과 노동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의 숨 멎는 듯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뿐만 아니라 우유를 따르는 일상이 계속되는 한 삶은 이어지며 순간은 영원이 된다고 말하는 시다. 미술관 그림 앞에 홀린 듯 골똘한 표정을 짓고 선 이들이 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쉼보르스카는 익숙한 모티브를 독창적으로 변주하며 일상과 생명을 긍정한 시인이다. 한국어판 『충분하다』는 생전 마지막 시집 『여기』와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엮은 책. 시인이 제목으로 미리 정해뒀다는 ‘충분하다’는 삶의 막바지,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경우는/ 나의 시야, 네가 꼼꼼히 읽히고,/ 논평되고, 기억되는 것이란다.// 그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 //세 번째 가능성은/이제 막 완성되었는데/ 잠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나의 시에게’ 부분)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모든 시가 첫 번째 경우였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김소연 시인 하루 우유

2024-03-06

[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의 조건

우리가 타인과 맺는 애정 관계의 질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정비례한다. (…)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더 의식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자기도취적 행동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애정 어린 일이다. 최선의 자기 자신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사랑을 잘하려면, 내가 나와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먼저 온전한 자기 자신(개인)이 되어야 한다.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현대인이 애정 관계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본 원인을 ‘마법 같은 동반자’라는 환상에서 찾는다. 어딘가에 ‘내게 꼭 맞는, 잃어버린 반쪽’이 있으며 삶은 그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라고 보는 오래된 착각 말이다. 사실 상대는 잃어버린 내 반쪽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이며, 대부분은 자신을 상대에 투사해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하는 데 머문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라며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완전한 타자로 존재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무심한 사랑’이라고 썼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도 내게 주지 못해.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나만 쟁취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애정 관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찬양할 수 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사랑 애정 관계 제임스 홀리스 자기도취적 행동

2024-02-28

[문장으로 읽는 책] 엘뤼아르 시 선집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석탄으로 불을 피우고/ 입맞춤으로 인간을 만드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따뜻한 법칙이다// 전쟁과 비참함/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힘든 법칙이다// 물을 빛으로/ 꿈을 현실로/ 적을 형제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유연한 법칙이다   폴 엘뤼아르 『엘뤼아르 시 선집』   오랜만에 엘뤼아르를 다시 읽는다. 1959년 국내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펴냈던 을유문화사가 2008년부터 야심차게 새로 선보이고 있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121번째 책이다.   “창공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불을 피웠네, / 그의 친구가 되기 위한 불,/ 겨울의 어둠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 더욱 잘 살기 위한 불을.”로 시작하는 ‘이곳에 살기 위하여’나 “내 초등학교 공책 위에/ 내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雪)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자유’, 양귀자 소설 제목으로도 쓰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전문인 ‘모퉁이’까지 엘뤼아르 시 120여 편을 원문과 함께 실었다. 국내에 덜 소개됐던 초현실주의 시 등 초기부터 후기까지 두루 일별할 수 있다.   인용문은 시 ‘올바른 정의’의 부분. ‘적을 형제로 바꾸는 것이 인간의 유연한 법칙’이라는 대목에 특히 눈이 간다. “딸과 엄마와 엄마와 딸과”를 수차례 반복하는 게 전부인 ‘자장가’나 “눈의 층계/ 형태의 창살을 가로지르는/ 영원한 계단/ 존재하지 않는 휴식”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마그리트 그림이 떠오르는 ‘르네 마그리트’ 등 새로운 시들이 많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엘뤼아르 마그리트 그림 르네 마그리트 초등학교 공책

2024-02-21

[문장으로 읽는 책] 돌봄이 돌보는 세계

물이나 산소처럼 돌봄 역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이토록 저평가된 배경에는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을 분리하고 재생산노동을 여성에게 떠넘겨 온 역사의 흐름이 있었다. 근대적 인간관과 독립성의 강조에서 인간의 의존은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할 숙제로 여겨졌다. 성장 및 개발중심사회는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을 추앙하면서,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몸을 쓸모없는 몸으로 규정해 왔다. 돌봄 노동을 저임금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평가가 필수적이다.   조한진희 외 『돌봄이 돌보는 세계』   그 결과 돌봄은 빈곤층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외주화됐다. 나만 해도 그렇다.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다른 여성에게 맡겼다. 월급은 ‘이모님’ 통장행이었다. 남의 손으로 아이를 키웠다는 죄책감도 컸다. 육아와 간병 같은 ‘여자들의 일’이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으로 폄훼되면서 전통적 성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이 날로 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누군가를 돌보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 있을까. 코로나19 이후 돌봄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되고 있지만 “나이 든 부모, 어린 자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은 여전하다. “그러니까 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저비용으로 알아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 그것이 돌봄이 처해 있는 정직한 현실 아닐까?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확장되고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돌봄의 기쁨이 복원되는 사회가 돌봄이 살아 있는 사회일 것이다.” 열 가지 키워드로 돌봄 이슈를 정리했다. 문장으로 읽는 책 세계 빈곤층 여성 근대적 인간관 자녀 질병

2024-02-14

[문장으로 읽는 책]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 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이반지하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어린 시절 작가가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글이다. 잔혹한 기억이 남긴 생채기를 이토록 선명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본명 김소윤, 독보적인 퀴어 퍼포먼스 아티스트 이반지하의 에세이집이다. 인용문처럼 혈관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글부터 머릿속에 ‘ㅋㅋㅋ’가 무한 재생되는 글까지, 에세이스트로서의 재능도 확인시킨다.   ‘퀴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그에게 이반지하는 “닉네임이나 부캐 같은 게 아니라, 한국에서 퀴어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자체”다. “이반지하는 혼돈이다. 이반지하는 간단명료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반지하는 정의할 수 없고 어떤 카테고리 하나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렇게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만나는 곳이 이반지하인 것은 아닐까.” “이반지하는 되는 게 아닙니다. 태어나는 겁니다. 날 때부터 많은 갈등과 트러블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겁니다. 폭탄처럼 탁 떨어지는 거예요.”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이반지하 이웃집 이웃집 퀴어 퀴어 퍼포먼스 퀴어 예술가

2024-02-07

[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의 언어

눈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날씨 중 가장 감각적인 날씨다. 만질 수 있고 뭉칠 수 있다. 밟을 수 있고 그 위에 누울 수 있다. 냄새를 맡고 먹어볼 수도 있다.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자국눈은 금세 사라지지만, 깊게 쌓인 길눈은 단단하게 굳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눈다리가 된다. 싸락싸락 내린 쌀알 같은 싸라기눈은 사박사박 쉽게 밟고 걸어갈 수 있지만, 발등이 빠질 정도로 내린 발등눈은 뽀드득 소리와 함께 발이 푹푹 빠진다. 고체였다가 액체가 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쌓이기도 한다.   우숙영 『산책의 언어』   아무 데나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으면 된다.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 날씨와 계절, 시간 등 자연에 대한 짧은 글이 담백하다. 매 장 뒤엔 어휘 사전도 실었다. 윗글만 해도 ‘자국눈’ ‘길눈’ ‘발등눈’ 같은 처음 들어본 우리말이 아름답다.   저자는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나무와 꽃, 초록색과 붉은색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가난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자연에 대해 풍부한 언어를 갖게 된다는 건, 세상에 대해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책하다 말고 쭈그리고 앉아 꽃 사진을 찍다 ‘너도 나이 들었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의 말대로 이제야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계가, 나와 인간이 중심이 아닌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라면서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조각이기도 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발견한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확장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 언어 동물 날씨 계절 시간 어휘 사전도

2024-01-31

[문장으로 읽는 책] 꽃을 끌고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 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 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 치는 혼령들이   강은교 『꽃을 끌고』   시 ‘진눈깨비’의 첫 연.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진눈깨비가 아니라 ‘비도 못 되고 눈도 못 된’, 조금은 무력하고 안쓰러운 진눈깨비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대여/ 어두운 세상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불꽃인 그대여.’   시와 산문을 곁들인 시·산문집이다. 이 시 뒤에 곁들인 산문에서 시인은 진눈깨비 같은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순간을 떠올린다. 사소한 것들의 생명력이 시집 곳곳에서 읽힌다.   ‘웃고 있네./ 눈도 감고 피도 식어서/ 피도 식고 뼈도 삭아서/ 그러나/ 아프지 않아서 웃고 있네.’ 이렇게 시작하는 시 ‘하관(下棺)’은 두 달 남짓 살다가 가버린 시인의 아이에게 바친 시다. 시인은 놀랍게도 아이를 보내면서도 생명을 본다. ‘아무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네./ 무덤 속이든지 꿈 속이든지/ 쥐 이빨도 안 들어가는/ 손톱 속이든지/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다시 물이 되고 바람이 될 때까지/ 살아서// 하늘은 아직도 하늘/ 햇빛은 억만년을 햇빛으로/ 흐르고 있네, 우리는./ 잠들지 못할 거네, 우리는.’ 시인은 “‘하관’을 쓰던 순간 죽은 아이의 잠이 흙 속에서 꽃 뿌리를 타고 따스하게 흘러가는 것을 이해했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불꽃인 그대 시집 곳곳

2024-01-24

[문장으로 읽는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조차 명인의 솜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 사랑은 평화였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언가 잘해주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그분의 작은 평화 속에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끌어 안으셨다.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이에게 무언가 잘해주려 애쓰다가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만과 다툼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딸을 낳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할머니의 사랑을 되돌아본다. 말수 적은 “언어의 미니멀리스트” 할머니는 잘했든 못했든 “장혀”라며 등을 두들겨줬다. “뭘 잘했다는 칭찬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낸 것이 장하다는 소중한 인정”이었다. 과정에 대한 칭찬이었다.   “할머니가 베푼 관용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전판이 되었다. 혹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창의력의 씨앗이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할머니

2024-01-17

[문장으로 읽는 책]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

영아기부터 대학 진학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양육은 더 많은 부모의 관심과 생각, 그리고 에너지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재정의되었고, 젊은 부부들은 양육을 무지막지한 짐을 끌어안거나, 아니면 양육을 완전히 거부하고 아이 없이 사는 것을 택한다. (…) 그들은 자신이 지는 양육의 짐을 자신과 아이의 삶에 대한 소중한 헌신이라고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매우 경쟁적이라고 보고, 따라서 집중적이고 맹렬한 양육이 성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러바인 외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   전 세계 양육 방식을 비교 고찰한 하버드대 인류학 교수 부부가 진정한 부모의 역할을 논한 양육서다. ‘집중 양육’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집중 양육에 대한 부담은 저출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양육 전문가나 대중매체들은 부모가 아동 발달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나 부모가 아이를 기를 때 직면하는 위험들은 과장하고, 아동의 회복탄력성이나 후기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회피 관습’에 따라 어머니와 아기가 눈맞춤을 피하는 아프리카 하우사 부족은 애착 형성에 심각한 문제가 예상되지만, 장성한 자녀들은 별문제가 없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양육 방식이 있으며 ‘한 사람의 인생은 6세 전에 70%가 완성된다’ 류의 조언이 때로는 근거가 약한 비과학적 조언이라는 게 결론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부모 양육 방식 양육 전문가 세계 양육

2024-01-10

[문장으로 읽는 책] 가녀장의 시대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의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복희’는 작가인 슬아의 엄마다. 30대 작가 슬아는 출판사를 차리고 ‘모부’인 복희와 웅이를 고용한다. 그래서 제목이 가부장 아니고 가녀장의 시대다. 매번 뚝딱 마법 같은 밥상을 차려내는 엄마 복희는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 실감하며,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맛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빠 웅이는 타투를 하고 싶은데 ‘아름다운 아저씨가 되는 건 쉽지 않으니 겸손한 귀여움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딸의 충고에 오른팔엔 청소기, 왼팔엔 대걸레를 새긴다. 가녀장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에 대한 얘기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늠름한 아가씨, 아름다운 아저씨, 경이로운 아줌마” 얘기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관계 맺음

2024-01-03

[문장으로 읽는 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 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동양 챔피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내서 젠체하는 거였는데, 나중에 그 ‘두번째 바람’이라는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더군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의 신간 소설집 중 ‘난주의 바다 앞에서’의 한 부분이다. 삶의 시련 끝에 작은 섬마을에서 출판되지 않는 소설을 쓰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세컨드 윈드란 ‘러너스 하이’처럼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 더는 바닥이 없다고 느껴질 때 불어오는 바람, 혹은 두 번째 삶을 뜻한다.   여자는 마을에 전해오는 조선 여인 정난주에 대한 동화 같은 얘기도 들려준다. 정난주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살아나자 하느님을 원망하며 ‘내가 죽어야 내 아들이 살 수 있으니 나를 죽게 해달라’고 울부짖는데, 이때 하느님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며 그 말씀을 들어주셨다는 얘기다.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을 끌어안는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미래 세컨드 윈드 신간 소설집 이때 하느님

2023-12-27

[문장으로 읽는 책] 영감달력

세상에서 가장 물러 터진 음식. 그러나 우리는 이 연약한 녀석을 상대할 때도 칼을 든다. 방심이 아니라 최선을 든다. 우리는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두부보다 강한 녀석들을 상대해야 한다.   정철 '영감달력'   ‘사람이 먼저다’로 유명한 카피라이터 정철이 ‘내가 봐도 잘 쓴 글’ 365개에 아이디어 메모를 곁들여 책으로 펴냈다. 인용문의 제목은 ‘두부’다.   ‘님을 위한 행진곡엔 내 이름이 나온다. 당신 이름도 나온다. 산 자.’(‘님을 위한 행진곡’) ‘음식을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가장 큰 그릇이 아니라 빈 그릇이다.’(‘큰 그릇이 아니라’) ‘일동 뒤로 돌아! 이 한마디를 기다린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이 바뀌는 날. 그날은 온다.’(‘꼴찌’) 단문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글이 많다.   ‘세상 모든 습관 중 쓸모 있는 습관은 하나뿐입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 내리기 전 화장지가 충분한지 확인하는 습관, 이것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습관은 변기에 쏟아붓고 물을 내리십시오. 습관적이라는 말은 습관이 적이라는 뜻입니다.’(‘습관’) ‘씨와 열매 사이에는 세월이 있다. 그것은 비, 바람, 곤충의 습격을 견디는 시간. 어떤 씨도 세월을 건너뛸 수 없다. 어떤 씨도 견디는 시간을 생략할 수 없다. 그대, 박철민씨도.’(‘씨와 열매 사이’)   작가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글을 잘 쓰려 하지 않는 것”, 그냥 “글을 쓰는 것”이라며 “메모하지 않은 생각은 발이 달린 생각입니다. 도망갑니다”라고 썼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이들에게 주는 팁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영감달력 정철 영감달력 습관 이것 카피라이터 정철

2023-12-20

[문장으로 읽는 책]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장자는 마침내 마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아내가 죽자 장자는 슬퍼하기는커녕 통을 두드리며 노래한다. 애도는 하지 못할지언정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는 대꾸한다.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나 모두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있냐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는데, 왜 죽었다고 새삼 슬퍼하느냐고.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다양한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허무’란 주제로 묶었다.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말하자면 허무와 더불어 사는 법에 대한 글인데 그림과 문학·고전 속에서 사유의 단서를 찾아낸다. 위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와 같은 장자의 위로에 공감하려면, 인생을 보다 큰 흐름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은 뒤의 상태뿐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까지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글쓰기도 허무와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다. 작가는 이윤주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인용한다. “엄습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쓸 필요가 있다고. 쓰기 시작하면 불안으로 인해 달구어졌던 편도체는 식고,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고. 쓰는 행위를 위해서 우리는 진정될 수 있다고.”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인생 김영민 서울대 이전 상태 글쓰기도 허무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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